| '뮤지션들의 뮤지션' 정원영 '소풍'…상실은 푸르른 음악 이태원 참사 희생자·김민기 등 기리며 만든 9집 뉴시스 |
| 2025년 11월 06일(목) 14: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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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적 음반 없이 음원 플랫폼에 EP와 싱글 형태로 보석 같은 열 곡을 발매한 뒤에도, 싱어송라이터 정원영은 이런 생각을 했다. 정규 음반 제작엔 막대한 비용이 소요되는데, 이를 감당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밴드 '긱스(GIGS)' 활동을 함께 한 사이이자 영화 '기생충',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게임' 음악감독인 정재일에게 "어떡하면 좋을까?"라고 의견을 구했다. 데모를 들은 정재일은 "가상악기로 녹음해도 되겠다"고 답했다.
정재일은 이후 맥북에 가상악기 프로그램을 담아 빌려줬고, 정원영은 집 앞 미디학원에 한 달 동안 다니며 배운 것을 토대로 집에서 녹음 작업을 진행했다.
최근 서울 마포구에서 만난 정원영은 "리얼 악기에 대한 아쉬움은 없었냐"는 물음에 고개를 내저었다. "꼭 리얼 악기에 대한 고집은 없어요. 재일 군이 이번 음악은 가상악기가 더 어울릴 거 같다는 말에 힘을 얻었다"고 담담히 말했다.
정원영은 이런 뮤지션이다. '뮤지션들의 뮤지션'이라는 말이 전혀 아깝지 않은 이 천생 뮤지션은 오랜 기간 호원대 실용음악과에서 수많은 뮤지션들의 스승이 됐지만, 스스로 배움을 주저하지 않는다. 전국 실용음악학원에선 정원영의 이름은 다 안다. 정원영은 겨울에 아들 이름으로 학원에 등록한 뒤 비니모자에 마스크 차림으로 열심히 배웠다. 그가 정원영인 줄은 아무도 몰랐다.
정원영과 '긱스'에서 한솥밥을 먹었고 매년 연초마다 대학로 학전에서 열리는 '김광석 노래상 경연대회'에서 그와 조우하는 이적은 "원영 형은 위계가 없어요. 그 분처럼 후배들을 동등하게 대해주는 분은 없다"고 잘라말했다.
정원영이 무엇을 하든 체통을 잃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명료한 음과 노랫말은 명료한 대로, 불명료한 음과 노랫말은 불명료한 대로 그 불가피성을 강조하지 않고 스며들게 만든다. 무엇이든 함부로, 억지로 지어내지 않는다.
최근 발매한 정규 9집 '소풍'도 그런 음반이다. 정원영이 2021년 정규 8집 '볕' 이후 4년 만에 낸 이번 앨범의 제목은 동명의 곡에서 타이틀을 가져왔다. 천상병 시인의 시 '귀천' 구절 중 하나에서 빌려왔다. 세상에 짧게 왔다가 떠나는 짧은 삶이 소풍이었기를 바라며 작업했다.
정원영은 앨범 소개글에선 이렇게 썼다. "홀로 남아 듣는 음악 속에서도 나는 당신이 있었다는 사실을 여기 여전히 확인한다. (…) 그러므로 모든 상실은 기어코 사랑을 선택했던 자들에게 남은 푸르른 음악." 이건 생과 죽음이 사실 충돌하는 게 아니라, 선순환하는 항임을 음악으로 확인하는 일이다.
'포크 대부' 김민기 전 학전 대표를 추모하며 쓴 '먼북소리'를 들어보자. "그대 없는 벌판으로 / 한걸음 내딛어본다 / 사는 게 살아내는 게 / 사랑이라 기억해낸다"
이윽고 이런 메아리가 들리는 듯하다. "잊어버려 일단 무조건 올라보는 거야 / 봉우리에 올라서서 손을 흔드는 거야 / 고함도 치면서 / 지금 힘든 것은 아무 것도 아냐 / 저 위 제일 높은 봉우리에서 / 늘어지게 한숨 잘 텐데 뭐" 김민기 '봉우리'의 노랫말이다.
맞다, '먼북소리'는 김민기 삶에 대한 명백한 답가. "가사는 민기 형을 생각하면서 썼어요. (김민기 대표곡 중 하나인) '아름다운 사람' 가사의 뉘앙스였으면 좋겠는 거예요. '벌판으로 가는 소년'의 느낌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먼북소리'엔 김민기하면 떠오르는 악기인 기타가 부재한다. 이를 통해 그를 더 생각나게 한다. 정원영의 담백한 보컬과 잔잔한 피아노와 신스(synth) 그리고 정상연의 휘파람이 전부다. 정원영은 "많은 악기를 쓰고 싶지가 않았다"고 했다.
인위적 존경이 습관화된 거물들이 있지만 김민기나 정원영이나 학전을 중심으로 모였다 흩어지는 뮤지션들에 대한 후배들의 자발적인 존경은 선배들의 인품에 절대적으로 힘 입었다.
'시(She)'도 이 맥락에 따라 첫 트랙에 자리 잡았다. 정원영은 젠더 문제와 관련 학생들과 얘기를 많이 나눈다. "젠더 문제가 음악가에게만 중요하겠어요? 음악 외에 여러 가지에 대해 얘기를 나눈 지 오래 됐어요."
사회 곳곳과 사람들 각각에서 채집해 만든 열 곡을 이미 발표했고 그걸 모은 이번 앨범의 시작은 2022년 10월29일 이태원 참사였다. 청년들이 다수 희생된 이 사건을 보고 앓은 열병을 어떻게든 끄집어낼 수밖에 없었고, 음악으로 무엇인가라도 표현을 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재작년, 작년에 먼저 세상을 떠난 음악계 중요한 인물들에 대한 마음도 음악에 녹여냈다. 김민기를 비롯 미국 팝 거물 프로듀서 퀸시 존스 등 국내외 유명 음악가들이 최근 몇 년 동안 먼저 눈을 감았다.
'정원영밴드'를 통해 후배 뮤지션들과 호흡을 맞춰 온 정원영은 우리 음악계 거목뿐 아니라, 신진 뮤지션들과도 인연이 깊다. CJ문화재단 인디 뮤지션 지원사업 '튠업(TUNE UP)'의 오랜 심사위원이다. 올해 26기로는 ▲공원 ▲김승주 ▲밀레나(Milena) ▲송소희 ▲오월오일 ▲정우석 등 총 6팀이 선정됐다.
네이버문화재단 '온스테이지'를 비롯해 인디 신(scene)의 든든한 지원 플랫폼들이 대거 사라진 가운데, '튠업'은 든든한 버팀목이다. "저도 인디 신을 지원하는데 작게 일조하고 있다는 게 영광이에요. 덕분에 훌륭한 뮤지션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도 좋고요. '웨이브투어스'처럼 튠업을 거친 엄청난 인물들도 엄청 많잖아요."
'튠업'이 인디 등용문이 된 이유는 내부의 치열한 토론이다. "자신들의 음악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 친구들을 뽑고자 해요. 웨이브투어스가 그런 경우고요. (CJ문화재단을 지원하는 CJ그룹의) 이미경 부회장님의 확고한 지원 의지도 튠업에 큰 도움이 됩니다. 사실 밴드를 유지하는 게 되게 힘들어요. 그런데 우리 음악계 다양성을 위해선 밴드 음악이 참 중요합니다. 부회장님도 밴드가 계속 나와야 한다는 말씀도 하시고요. 그래야 문화가 더 생명력 있게 꿈틀대죠. 굉장히 중요한 에너지인 거예요."
그런데 최근엔 인공지능(AI)이 밴드 음악을 뚝딱 만들어내고 있다. 정원영과 실용음악학과 교수들은 하지만 현 상황을 부정적으로만 보지 않았다. "오히려 연주 잘하고 노래 잘하는 사람들이 제일 주목 받을 것"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가짜가 많아지니까, 사람들은 실제 연주를 더 보려고 할 겁니다. AI 때문에 경쟁력이 약해지는 게 아니라 연주, 노래를 잘 하는 뮤지션들은 더 주목받을 거예요. 이것이 음악의 기반인 '밴드의 힘'이 더 필요한 이유죠."
최근 브릿팝 전설 '오아시스' 내한공연엔 직접 가보지 못했지만, 현장을 다녀온 제자들의 얘기를 들으면서 밴드 라이브 힘을 느꼈다고 했다. "우리나라 민족은 놀기 좋아하고 흥 자체가 많은 거 같아요. 현장에서 강강술래를 하다니요. 하하. '오아시스가 한국을 안 좋아할 수가 없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연세대에서 강의를 이어가는 정원영은 올해 호원대에서 정년퇴임했다. 정원영이 있다는 이유로 이 학과에 지원하는 음악 지망생들이 수두룩했다. 정원영은 그러나 "좋은 재능들을 가진 친구들을 만나게 돼서 제가 행복했다"고 겸손했다. "아직 빛을 못 본 친구들도 있지만 클래스에서 그들이 내는 소리 때문에 제가 아침부터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학교 다니는 동안 제 복이었죠."
최근 SBS TV 오디션 '우리들의 발라드' 참가자로 밴드 '자우림' 김윤아의 솔로곡 '꿈'을 불러 호평을 받은 이서영도 정원영의 제자다.
"사람들이 '서영이를 알아보는구나'라는 생각에 뿌듯했어요. 우리나라에 노래 잘하는 친구들이 많고 제 제자들도 다 너무 좋은 재능을 갖고 있어요. 그런데 좋은 재능들이라고 다 성공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그럼에도 오랫동안 잘 견뎌냈으면 좋겠어요. 왜냐하면 음악만 그렇게 버텨야 하는 건 아니거든요. 다시 얘기하면 음악을 한다는 건 되게 멋진 직업이지만, 음악만 특별한 건 아니죠. 다 각자의 힘듦이 있어요. 학생들에게 외국의 예도 많이 들려줘요. 일본, 미국, 유럽은 더 치열하거든요. 그럼에도 왜 그들이 계속 음악을 붙들고 있는지, 낮에 일하고 와서 밤에 만나 연주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로 끝나요. 음악이 너무 좋으니까요. 아들, 제자들도 제게 물어봤어요. 음악 외에 다른 걸 해보고 싶은 생각은 안 들었냐고요. 근데 전 음악이 너무 좋아요."
정원영은 그러면서 영국 팝 거장 스팅이 미국 버클리 음대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받으며 들려준 연설을 떠올렸다. '안녕 미래의 실업자들'이라고 농담 섞인 인사로 연설을 시작한 스팅은 음악가로서 성공하거나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아파트에서 홀로 고양이한테 음악을 들려준다고 해도 '우리는 영혼을 치료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행하고 있다'며 음악의 가치를 톺아봤다.
정원영이 음반을 내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몇 년 동안 많은 이들을 떠내 보내는 가운데 슬픈 마음을 꾹 꾹 눌러 담은 '시', '히(HE)', '로스트(LOST)' 같은 곡들이 누군가의 영혼을 치료해줄 수 있는 혹은 위로가 된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현재 함께 살아가고 있는 이들로부터 감사함도 느낀다. WSM, 즉 '원형 사랑 모임'에 속한 재능 있는 그의 팬들이 앨범 재킷, 커버 등의 작업에 발벗고 나섰고 가수 장기하, 장기하가 속한 두루두루아티스트 컴퍼니 강명진 대표, 정원영이 믿고 따르는 선배인 '작은 거인' 김수철 등이 실질적인 음반 제작에 보탬이 되는 마음을 더해줬다.
정원영의 음악, 주변 사람에 대한 애정은 원심력으로 펴져나갔고 그건 음악이라는 구심력으로 되돌아왔다. 기도하는 손을 떠올리게 하는 제목의 연주곡 '핸즈(Hands)'에 그런 마음을 담았다. "용서, 자비, 감사… 이런 단어들이 계속 떠오르는 시기예요."
뉴시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