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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0일 공개된 넷플릭스 영화 '이 별에 필요한'은 넷플릭스가 선보인 첫 번째 한국 장편 애니메이션이다. 이미 잘 알려진 것처럼 국내 애니메이션 산업은 쪼그라들대로 쪼그라들어 영유아용이 아닌 애니메이션 영화가 나온다는 것 자체가 워낙에 귀한 일이 돼버렸다. 한 마디로 한국은 애니메이션 불모지. 이런 상황에서 넷플릭스 같은 글로벌 스트리밍 회사가 한국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를 내놓는다는 건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다. 주인공은 한지원(36) 감독. 업계는 진작에 그를 한국 애니메이션의 희망으로 불러왔고, 결국 한 감독은 넷플릭스와 '이 별에 필요한'을 합작해 유독 한국에서만 침체된 이 산업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데 기여하고 있다.
그래서 걱정이 됐다. 이 재능 있는 창작자 역시 소위 더 돈이 된다고 하는 실사 영화로 옮겨 가는 건 아닐까. 한 감독에게 결국 최종 목표는 실사 영화를 찍는 것이냐고 묻자 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는 "어떤 일을 절대로 하지 않을 거라고 말하지는 않겠다"면서도 "내 최종 목표는 애니메이션을 계속 해나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만화를 그릴 수도 있고, 실사 영화를 할 수도 있을 거예요. 어떤 작업을 절대 하지 않겠다고 말할 순 없을 겁니다. 하지만 제가 어떤 시도를 하든 그 모든 건 결국 애니메이션으로 돌아오기 위한 과정이 될 겁니다. 저는 '원령공주'를 보고 애니메이션 일을 하겠다고 마음 먹은 이후에 그 마음이 흔들린 적이 없어요. 아마도 이 마음은 제가 아주 나이가 들 때까진 유지될 것 같아요. '이 별에 필요한'에서 여러 훌륭한 아티스트와 협업하면서 제 작품이 더 넓어질 수 있다고 믿게 됐습니다. 제가 하는 일은 뭐가 됐든 다 애니메이션에 녹여내기 위한 것일 거예요."
한 감독이 이 한 번의 기회를 얻기 위해 걸린 시간만 10년이다. 2010년 단편 애니메이션 '코피루왁'으로 주목 받은 이후 10여년 간 만들어낸 단편·중편·장편 애니메이션만 4편이었다. 이 숫자만 보면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관심을 거의 받지 못하는 분야에서, 독립적으로, 지치지 않고 꿈을 펼쳐나가면서, 꾸준히 작품을 내놓는다는 건 결코 간단히 얘기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약 5년에 걸친 '이 별에 필요한' 작업 과정이 힘들진 않았냐고 물었을 때 한 감독은 망설임 없이 "힘든 건 없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시간을 더 줬다면 더 할 수도 있었다"고 말하며 웃었다.
데뷔한지 10년만에 기회를 얻은 뒤에 5년을 쏟아부어 만들어낸 '이 별에 필요한'은 2051년 서울이 배경인 로맨스물이다. 미국에서 화성 탐사에 도전했지만 마지막 관문을 넘지 못하고 한국으로 돌아온 난영과 뮤지션으로 사는 삶을 사실상 포기한 채 레트로 음향 기기 수리 일을 하는 제이가 우연히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그렇다고 두 사람의 관계에만 집중하진 않는다. 각자 가진 트라우마를 극복해가는 과정이 이들의 사랑 못지 않게 비중 있게 다뤄지며, 사랑과 일이 어떻게 이 연인을 상호보완하는지 그려간다. 여성 우주인의 꿈과 그가 겪은 어린 시절 아픔에 관한 단편에다가 로맨스를 더해보자는 제작사 아이디어가 추가됐고, 그 단편에 음악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에 착안해 남성 캐릭터를 뮤지션으로 설정해 이야기 얼개를 만들었다.
"이 작품이 기획 단계일 때 연애 중이었어요. 사랑에 대한 감정을 이 작품에 가득 담아 구성한 거죠.(웃음) 그때 제가 가장 많이 생각했던 게 사랑과 일의 관계, 꿈과 일의 관계였습니다. 전 일에 중독돼 있는 사람이었어요. 연애를 하면 일에 쓰는 시간이 어쩔 수 없이 줄어들게 되잖아요. 사랑과 일 사이에서 무언가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인가, 라는 질문을 나 자신에게 많이 했던 거죠. 아무리 생각할수록 제가 일에 매달리는 건 사랑이 부재하기 때문이고, 내 마음이 공허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제가 일에 중독된 건 마음의 불안 때문이라고 생각했고요. 그때 이런 저를 따뜻하게 안아주는,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남자친구가 있었던 겁니다. 결국 그 남자친구랑 결혼했어요.(웃음)"
'이 별에 필요한'은 난영과 제이의 사랑을 다루고 있긴 해도 결국 난영의 이야기라고 봐야 할 것이다. 엄마가 세상을 떠난 바로 그 화성에 가서 엄마의 사랑을 느끼고 돌아와 제이와 사랑을 다시 시작하고 이 모든 과정을 주체적으로 풀어가는 캐릭터가 난영이기 때문이다. 한 감독은 이 같은 여성 캐릭터를 통해 애니메이션을 사랑하게 됐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을 얘기했다.
"앞서도 말했는데 전 '원령공주' 같은 작품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당연히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요. 하야오 감독 작품을 보면 힘있는 여성 주인공이 등장해 삶을 씩씩하게 헤쳐나가는 이야기가 많죠. 여성 캐릭터의 시점에서 사랑을 볼 때, 세상을 볼 때 나오는 그것만의 매력이 분명히 있어요. 그리고 그 여성 캐릭터가 언제나 입체적입니다. 게다가 이야기를 보면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죠. 하야오 감독 애니메이션은 애니메이션 특유의 맑고 깨끗한 것들만 있지 않잖아요. 어두운 부분을 향해 반드시 들어가죠. 전 그게 좋아요."
이 영화에서 돋보이는 또 한 가지 부분은 미래 서울의 풍경이다. 증강현실을 적극 활용한 최첨단 기술이 시종일관 펼쳐지는 것과 동시에 변하지 않고 남아 있는 서울의 풍광을 뒤섞으며 흔히 얘기하는 '사이버 펑크'를 구현한다. 이런 대목은 와타나베 신이치로 감독이 만든 TV애니메이션 시리즈 '카우보이 비밥'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카우보이 비밥'은 우주가 배경인데도 그 안에 현실 세계 사람들의 생활이 녹아들어가 있죠. 그게 참 멋져요. 그리고 저희 영화는 음악이 큰 역할을 하기도 하잖아요. '카우보이 비밥' 역시 우주에 음악이 어우러지는 게 가장 큰 특징이기도 합니다. 이 뿐만 아니라 신카이 마코토 감독님 영향도 있을 거예요. 대학생 때 '언어의 정원'을 보고 받은 충격을 잊을 수 없거든요."
한 감독은 차기작이 이미 정해졌다고 했다. 매우 장르적인, 다크 판타지에 크리처가 나오는 작품이 될 거라고 했다. 캐릭터 고유의 개성에 집중하면서 그 캐릭터의 심리가 주제가 되는 작품이라고도 했다. "그런데 이 작품도 얼마나 걸릴지 언제 나올지 몰라요.(웃음)"
차기작 역시 주류에 속해 있다고 할 수 있는 콘텐츠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한 감독은 "이게 내겐 너무나 자연스러운 길"이라고 했다. "그런 말 하잖아요. '요즘 이런 걸 해야 잘 된대' '이런 걸 해야 사람들이 좋아한대' 같은 말들이요. 저는 제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무섭더라도 보여주는 시도를 하고 싶어요. 그래서 '이런 건 처음 보는데 좋다'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