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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연못 위에 솟은 주황색 키네틱 아트는 장관이다. 강렬한 색이 먼저 시선을 낚아챈다. 수없이 늘어진 주황빛 리본은 제주의 바람에 온몸을 맡긴 채 쉴 새 없이 흔들린다.
프랑스 작가 피에르 파브르의 ‘Jeju lava’(2026)다. 제주 용암에서 착안했다. 바람이 리본을 흔들면 수면에 비친 형상도 함께 일렁인다. 매 순간 다른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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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브르는 지난해 이곳을 찾았을 때 미술관 앞 수면을 거울처럼 봤다. “물 위에 작품을 설치하고 싶었다”는 그는 제주비엔날레를 위해 용암과 화산의 이미지를 끌어들였다.
가볍고 유연한 리본을 사용하고 바람의 풍속에 대응하도록 구조를 설계했다.
그러나 작품을 움직이는 것은 작가가 아니다. 제주의 바람이다. 바람은 리본을 흔들고 물은 주황빛 형상을 다시 비춘다. 자연을 재현한 것이 아니라 자연이 작품 속으로 직접 들어왔다.
작가가 만들었지만 제주가 완성한다.
제5회 제주비엔날레 ‘허끄곡 모닥치곡 이야홍: 변용의 기술(The Art of Metamorphosis)’을 압축한 장면이다.
20개국 69팀이 참여한 비엔날레는 제주도립미술관, 제주돌문화공원 오백장군갤러리, 제주아트플랫폼, 예술공간 이아, 갤러리레미콘 등 5곳에서 펼쳐진다.
‘허끄곡 모닥치곡 이야홍’은 섞고, 모으고, 흥을 돋운다는 뜻의 제주어다. 제목은 어렵지만 전시는 어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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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옛것을 박제하지 않았다
올해 비엔날레는 화려한 국제성보다 제주 안으로 파고들었다.
유배와 돌, 굿과 신화, 할망의 말과 푸른콩까지 끌어들였다. 그렇다고 옛것을 박제하지 않았다. 추사의 글씨는 회화와 조각으로, 돌은 영상으로, 꼭두는 인공지능으로 옮겨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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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립미술관은 ‘추사의 견지에서: 유배’를 주제로 추사 김정희와 ‘세한도’에서 출발한다. 현중화, 강요배, 백남준, 이우환, 차학경 등 서로 다른 시대와 언어의 작품을 한 공간에 불러들였다.
유배는 제주만의 역사에 머물지 않는다. 고향을 떠나 낯선 곳에서 살아야 했던 이동과 단절, 생존의 이야기로 확장된다.
시민갤러리에서는 이진경의 ‘나는 그 초록인가’(2026)가 제주의 아픈 역사를 끌어낸다. 정난주와 제주 민란의 기억을 유목과 먹, 한지, 캔버스, 사운드로 풀었다.
상처의 역사를 재현하는 대신 살아남은 생명력의 색, ‘초록’으로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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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출신 이현태의 ‘어 김없 는것과 어긋나는 (거)’(2026)는 소리와 시간을 끌어들인다. 서로 다른 사람들의 불규칙한 호흡과 소리가 얽히고 벽에는 보라색과 푸른빛의 형상이 번진다.
눈으로 보던 전시가 귀로 듣는 전시가 된다.
'제주 화가'강요배 앞에서는 제주가 삶의 자리로 내려온다. ‘세한도’에서 출발한 전시에 그가 내놓은 것은 뜻밖에도 ‘도새기 통시’(2026)다. 제주 집집마다 있었던 전통 화장실이다. 짙은 거름의 색 속에 까만 돼지 한 마리가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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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요배는 고고한 문인정신을 좇지 않았다. 유기물이 발효되고 인분은 거름이 돼 다시 땅으로 돌아갔던 제주인의 삶을 끌어냈다. 냄새까지 밴 생활정서다. 제주의 미학은 아름다운 풍경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통시에도 있었다.
윤진미의 ‘Inverted City’(2008)와 ‘Untunnelling Vision’(2020)은 실제 제주 돌과 한 공간에서 뒤엉킨다. 뒤집힌 도시 영상과 굿의 강렬한 사운드가 충돌하며, 경계를 넘는 이주와 이동, 전승과 변형의 문화적 힘을 드러낸다.
사람의 호흡은 빛과 소리가 되고, 통시의 기억은 회화가 된다. 제주 돌은 다시 영상과 사운드로 옮겨간다. ‘변용의 기술’이 눈앞의 장면으로 읽히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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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 한편에서는 꼭두가 관객의 말에 반응한다. 전통적인 존재를 유리장에 가두는 대신 오늘의 관객과 말을 섞게 했다.
입구에는 제주 푸른콩을 넣고 소원을 적은 천 주머니가 수북하다. 제주 할망과 해녀의 말이 놓인 자리에 관람객도 자신의 바람 하나를 보탠다. 먹을 것이 귀했던 제주에서 콩은 중요한 식재료였다. 지난해 사전 프로그램의 ‘콩베개’는 이번 본전시에서 관람객이 직접 만드는 콩주머니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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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 밖에서도 돌은 다른 이야기를 만든다. 제주비엔날레 홍보대사인 강연가 김창옥은 돌챙이였던 아버지를 떠올리며 미술관 뒷마당에 사방탑을 쌓았다. 최근 시작한 옻칠 작업을 돌에 입혀 탑 위에 올렸다. 미술관 앞마당의 주황색 키네틱 작품이 생의 기운을 드러낸다면, 뒷마당의 돌탑은 소멸을 이야기한다.
돌은 제주돌문화공원으로 가면 전시의 주인공이 된다.
송필의 ‘실크로드, 전설(Version 2)’(2022)이 관람객을 맞고 있다. 거대한 돌을 등에 진 산양과 질주하는 말의 형상을 통해 실크로드를 따라 동서를 오간 문명의 흐름과 이동·정착의 역사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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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진아의 ‘진화적 키메라-가이아’에서는 인간과 기계, 과거와 미래가 기묘한 생명체 안에서 뒤섞인다. 인공지능 두상과 인류 진화의 표본을 결합해 진화를 하나의 계보가 아니라 끊임없이 섞이고 변하는 과정으로 뒤집는다.
돌은 가만히 있지도 않는다. 소리를 내고, 가상공간에서는 화석이 다시 살아난다. 룸톤의 VR ‘에코스피어’는 돌과 화석이 품은 오래된 시간을 가상현실의 감각으로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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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카베 마사오와 미나토 치히로의 ‘TIME RINGS’(2026)는 반대로 손으로 장소의 시간을 더듬는다. 제주와 홋카이도, 히로시마 등 역사적 장소의 표면을 프로타주로 떠내고 그 과정을 사진과 영상으로 기록했다.
VR이 돌과 화석의 시간을 가상공간으로 불러낸다면 프로타주는 사람이 직접 장소의 피부를 문질러 기억을 떠낸다.
제주에서 너무 흔해 오히려 보이지 않던 돌이 소리가 되고, 영상이 되고, 가상현실이 되고, 종이 위의 흔적으로 남는다. 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돌이 품은 시간을 여러 감각으로 꺼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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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돌·신화…제주를 ‘방법’으로
원도심에서는 신화와 굿이 등장한다.
예술공간 이아에서 김상돈은 탐라국 건국신화의 삼을나와 심방, 해녀인 네 여신을 교차시킨 ‘거울 속 열쇠들’을 펼친다. 내왓당 무신도와 손유진의 회화, 곽윤주의 굿 영상도 이어진다.
전시장 자체도 변용됐다. 관청 이아의 터는 병원 등을 거쳐 예술공간 이아가 됐다. 아카데미극장은 제주아트플랫폼으로, 제주 최초의 현대식 호텔이었던 명승호텔은 갤러리레미콘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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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만 변한 것이 아니다. 장소도 변해왔다.
지난 제4회가 ‘표류’를 통해 제주와 남방문화의 연결을 탐구했다면 제5회는 유배와 돌문화, 신화를 파고든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20개국 69팀’이라는 외형보다 제주를 얼마나 깊게 읽었느냐다.
제주를 세계에 보여주겠다고 바깥으로 달려가지 않았다. 유배와 돌, 굿과 신화, 바람과 습기, 할망의 말과 푸른콩까지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제주 이야기는 이동과 생존, 기억과 기원, 인간과 자연이라는 보편적인 질문으로 번진다.
지역적인 것은 세계적인 것의 반대말이 아니었다.
올해 예산 20억원 규모의 제주비엔날레는 존폐 논란도 겪었다. 대형 국제비엔날레와 규모와 물량으로 경쟁하기는 어렵다. 결국 승부처는 ‘제주에서만 볼 수 있는 전시’를 얼마나 만들어내느냐다.
그런 점에서 올해는 예년보다 볼거리가 확실히 풍성해졌다. 바람과 돌, 유배와 통시, 굿과 신화까지 제주의 자연과 역사, 생활을 동시대 미술로 풀어내는 방식도 한층 선명하다.
규모보다 제주다. 제5회 제주비엔날레가 비로소 자기 색을 드러냈다. 이번 전시는 제주도립미술관장인 이종후 예술감독과 독립기획자 이병희 총괄큐레이터가 기획했다.
제5회 제주비엔날레는 오는 11월15일까지 열린다. 제주도립미술관은 성인 8000원이며 나머지 4개 전시공간은 무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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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시스
2026.09.18 (금) 13: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