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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력 늘었다고요? 중간에 들어가다 보니 시간이 촉박해 더 열심히, 주어진 시간 내 작품에 피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 노력했어요. 주변 도움도 많이 받았죠. 선배, 감독, 작가님이 코멘트를 해줬고, 촬영장에서 스태프들도 연기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줘서 결과가 보이지 않았나 싶어요. 저 항상 노력은 했거든요. 4년 전부터 발성 학원을 다녔는데, 이번에 좋은 반응이 많아서 뿌듯했죠. 운명이라고 느끼기 보다 부담감이 가장 컸어요. '갑자기 나에게 왜 이런 자리가 마련됐지'라는 생각도 했고요. 이 작품을 위해 불사르겠다는 마음으로 했죠."
이 드라마는 스타 요리사 '연지영'(임윤아)이 조선시대로 타임슬립, 최악의 폭군이자 최고의 미식가 왕 이헌을 만나 요리 능력을 펼치는 이야기다. 웹소설 '연산군의 셰프로 살아남기'가 원작이며, 여러 작가가 함께 썼다. 당초 합작(HapJak)으로 표기했다가, fGRD로 바꿨는데 제작사 필름그리다 약자다. '밤에 피는 꽃'(2024) 장태유 PD가 연출했다.
제작발표회에서 장 PD는 이채민 캐스팅 관련 "120% 만족한다"고 했는데, "감독님이 어느 순간부터 '너가 하고 싶은대로 하라'고 했다. 그때 나도 '이제 뭔가 좀 이헌처럼 보이기 시작한 건가' 싶더라. 자신감이 생겨서 조금 더 자유롭게 하려고 했다. 초반엔 캐릭터를 잡기 위해 많이 생각하면서 연기했는데, 중반부부터 감독님 조언을 듣고 자신감있게 뿜어내려고 했다"고 돌아봤다.
무엇보다 '이 캐릭터를 소화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컸다. "지금까지 맡은 역 중 아픔이 깊고 에너지도 많이 쓰고 서사도 있다 보니 '단기간에 표현할 수 있을까' 싶더라"면서 "거의 죽기 살기로 했다. 매일 극본을 보고, 거울을 보면서 표정 연구하고 '어떻게 하면 비열해 보일까' '폭군이지만 사랑스러워 보일까' 고민했다. 폭군이지만 따뜻한 면이 있고 맛있는 음식만 보면 좋아하고 아이처럼 순수해 다양한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설명했다.
"나로부터 출발했다. 친한 분들과 있을 때 '광기 어리다고'까지 하기 그렇지만, '눈을 어떻게 뜨냐에 딸라 달라 보인다'고 하더라. 나에게도 사나워 보이면서 천진난만한 모습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나를 믿으려고 했다"며 "매일 승마, 서예를 배웠다. 촬영 초반까지 캐릭터를 잡을 수 있도록 감독, 선배들과 그룹 리딩을 했다. 승마는 처음 해봤지만, 원래 운동을 좋아해 금방 습득했다. 막바지 돼서 대역 없이 잘 타게 돼 아쉬웠지만, 잘 나와서 뿌듯하다"고 했다.
특히 지영 음식을 먹고 맛을 표현하는 장면이 어려웠을 터다. 병맛 컴퓨터그래픽(CG)과 만화적인 요소를 녹여 실소가 터지게 했다. "혼자 부끄러울 때도 많았는데, 막상 나온 장면을 보니 재밌더라. '부끄러움을 감내하면서 하길 잘했다' 싶었다. 드라마에서 중요한 컷"이라며 "음식이 주된 내용이라서 막중한 책임감을 갖고, 애니메이션, 먹방 영상 등 여러 자료를 보고 따라했다. '어떻게 먹어야 보기 불편하지 않게 먹을까' 고민했다. 아무래도 고기를 좋아해 지영이 만들어준 비프 부르기뇽이 가장 맛있었다"고 귀띔했다.
"가장 현타 오면서 만족한 장면이 겹쳐요. 사슴 혀를 먹고 갑자기 갈대 밭에 갔을 때 현장에서 반응이 뜨거웠죠. 가장 이현 같고 광기 어린 느낌이었어요. 망가지는 장면을 찍을 때 자기 최면을 걸었습니다. '내가 망가지는 모습까지 좋아해주겠지? 좋아해줬으면 좋겠다'고 바랐죠. 극본에는 짧게 한 두 줄 표현돼 있는데, 직접 먹으면서 느낀 점을 최대한 표현하려고 했어요. 어떤 공간인지 명확하지 않고 '봉황이 올라올 것 같다' '뒤에 완두콩이 터질 거다' 등의 힌트를 줬죠. 여러 아이디어를 내며 표현했는데 뒤로 갈수록 고갈 돼 김형묵 선배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열살 연상 윤아와 로맨스도 이질감없이 소화했다. 원작보다 판타지 로맨스를 가미, 시청자 호응을 이끌었다. "윤아 선배와 연기할 때는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면서 "로맨스 할 때 선배 역할이 컸다. 연상 상대역은 처음이었는데, 걱정한 부분을 좋게 봐줘서 다행이다. 그만큼 호흡이 잘 맞아서 상쇄된 게 아닌가 싶다. 편하게 누나라고 부르고, 선배는 '채민아, 가끔씩 이헌이라고 해줬다"며 고마워했다.
결말은 호불호가 갈렸다. 마지막회에서 지영과 이헌은 위기를 딛고 현대에서 재회해 사랑을 이어갔는데, 해피엔딩이 아니라 '회피엔딩'이라는 혹평이 많았다. 이헌이 어떻게 현대로 왔는지 보여주지 않았는데 "사랑의 힘"이라고 짚었다. "사실 극본을 읽고 연기하는 입장에서는 설득이 됐다. 지영이 도와준 게 아닐까 싶다"면서 "이헌이 뭐하고 살지도 고민해봤다. 마지막 에필로그에 지영이에게 비빔밥을 해주지 않았느냐. 지영에게 배워서 보조 요리사로 일하면 어떨까 싶다"며 웃었다.
준비된 자에게 기회가 오는 법이다. 이채민은 2021년 드라마 '하이클래스'로 데뷔, 5년 차에 잡은 기회를 어떻게 살려갈까. "폭군의 셰프는 큰 동기부여이자 원동력이 됐다"며 "'내가 하는 연기가 남들에게 이렇게 보일 수도 있구나' 싶더라. 시각이 열렸고, 앞으로 연기 깊이를 더 고민할 것"이라고 했다.
"이 일을 하면서 가장 큰 목표는 나를 잃지 않는 거예요. 다양한 상황에 맞게 변조는 주겠지만, 저 자신 자체는 크게 달라지고 싶지 않아요. 좋은 배우이기 전에 좋은 사람이어야 보는 분들도 좋은 영향을 받고 저를 바라봐줄 것 같아요. 그러려고 더 노력할 겁니다. 살아가면서 예전의 제가 아닌 모습으로 변할 수 있는데, 부모님도 항상 '겸손하고 변하지 말라'고 하죠. 초심을 잃지 않겠습니다."
뉴시스